오키나와 여행 준비 국제운전면허증 총정리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은 17세기 초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흔든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묵인 하에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을 침공해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지배력을 강화한 뒤, 1872년에 류큐 왕국을 해체했으며,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합병했습니다.
1609년 가고시마현을 지배하던 사쓰마번(薩摩藩)의 류큐 침공은 일본 에도 시대 초기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1429년에 삼국을 통일하면 탄생한 류큐 왕국은 가고시마현 아마미 제도부터 오키나와 본섬, 미야코지마와 이시가키지마까지 세력을 확대하며 발전했습니다. 이들 지역을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나1609년에 사쓰마번의 침공으로 류큐 왕국은 급속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에도 막부와 류큐 왕국의 관계도 에도 막부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당시 사쓰마번은 현재 가고시마현 아마미 제도를 시작으로 오키나와를 무력으로 공격했습니다. 우선 침공의 배경부터 살펴볼까요?
류큐 왕국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해상 교역국으로 발전했으며, 일본과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무역 관계를 확대했습니다.
특히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류큐 왕국 경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일본은 중세부터 류큐와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에도 시대에 접어들어 도쿠가와 막부는 류큐 왕국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했습니다.
한편 1588년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류큐 왕국이 사신을 파경하지 않는다며 보복하고자 합니다. 이후 조선을 침공하면서 류큐 왕국에 군대 파병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군량미로 대신하고자 했으며, 명나라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한편 사쓰마번은 일본 남서부의 강력한 봉건영주 다이묘가 지배하는 작은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신하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중국 간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을 통해 중국과 간접적으로 무역을 재개하려는 전략을 구상했습니다. 류큐를 장악함으로써 무역 이익을 독점하려는 경제적 동기도 강했습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이는 사쓰마번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함으로써 막부 체제의 안정성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1609년에 사쓰마번은 무력침공에 나섭니다. 류큐 침공은 사쓰마번만의 독자적 군사행동이 아니라 막부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전쟁이었습니다.
무력공격의 빌미로 삼은 것은 사쓰마번 영주의 운항허가서가 없는 선박을 단속하라고 요구에 류큐왕국에서 거부한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사쓰마번은 1609년 3월부터 4월까지 두 달간 류큐 침공을 감행합니다. 류큐 침공의 주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쓰마번은 약 3,000명의 병력을 동원하고 100척 이상의 선박을 준비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평화적인 외교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에 군사력이 미약했고, 침공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사쓰마군은 류큐 본섬을 침공하기 전에 아마미 제도의 여러 섬을 공격해 점령합니다. 당시 아마미 제도는 류큐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1609년 3월 4일 출항해 3일 뒤에 아마미 제도에 도착합니다.
이후 3월 25일 사쓰마군은 오키나와 본섬 북부 나키진에 도착했습니다. 사쓰마군은 나키진성을 점령하고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사쓰마군은 육로가 아닌 해로를 선택합니다. 나하 근처 우라소에에 도착한 뒤 류큐 왕국의 수도인 슈리성으로 진격합니다.
사쓰마군은 4월 1일 슈리성에서 가까운 항구 도시 나하에 도착합니다. 이후 슈리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류큐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했고, 사쓰마군은 빠르게 나하와 슈리성을 점령했습니다.
류큐 왕국의 쇼네이 왕은 사쓰마군의 압박에 항복했습니다. 왕과 고위 관리들은 포로로 잡혀 사쓰마로 이송되었습니다. 이후 류큐 왕국은 일본의 속국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은 일본과 류큐 왕국의 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류큐 왕국은 사쓰마번의 간접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쇼네이 왕은 사쓰마번의 허락 없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매년 사쓰마번에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일본의 속국이 되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독립국으로 외교활동을 했습니다.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이 지속되었으며, 이를 통해 사쓰마번은 중국과의 간접 무역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중 조공 체제는 류큐 왕국의 외교적 독창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됩니다.
류큐 왕국은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본 문화와의 교류가 증가했습니다. 일본식 무기와 의복, 관습 등이 류큐에 유입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류큐의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는 유지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오키나와 문화 형성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쓰마번의 류큐 지배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회피하면서도 류큐를 통해 중국과의 무역을 지속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중국 중심의 조공 체제에 간접적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은 류큐 왕국 흥망사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군사적 정복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달성한 사례로, 일본과 류큐 왕국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사건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본-오키나와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동시에, 류큐 왕국이 보여준 외교적 유연성과 문화적 독립성은 이중 조공 체제라는 독특한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 이후 지배력을 강화한 에도 막부는 1872년에 류큐왕국은 해체되었으며,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합병되었습니다. 이후 류큐는 사라지고 일본에 동화되어 오늘날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