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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여행 준비 국제운전면허증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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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서 렌트카를 빌리려면 필요한 서류가 세가지 있습니다.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 한국 운전면허증입니다. 그렇다면 국제운전면허증은 어떻게 발급할까요? 혹시 운전면허증을 분실했는데 임시면허증은 괜찮을까요? 오키나와 여행 준비 국제운전면허증을 총정리합니다. 1. 오키나와 여행 렌트카 필수 요즘 오카나와를 여행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나하시에서 슈퍼에 가면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부분 렌트카를 이용하는데요. 오키나와는 대중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오키나와에서 렌트카를 이용하려선 필수 서류가 세가지 있습니다. 여권, 국제운전면허증, 국내 운전면허증입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렌트카 업체에서 차량을 인도받을 때 제시해야 합니다. 사본도 안 됩니다. 반드시 원본을 제시해야 합니다. 2.  국제운전면허증 발급방법 국제운전면허증은 외국에서 운전할 수 있도록 국내 운전면허를 국제적으로 인증하는 증명서입니다. 제네바 협정 가입국에서 유효합니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렌트카를 이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증명서입니다. 1) 국제운전면허증 발급장소 요즘 운전면허증 뒷면에 영문증명서가 기재되는데요, 이는 국제운전면허증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외에서 렌트카를 빌릴 수가 없어요. 반드시 수첩형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합니다.  유효기간은 발급일로부터 1년입니다. 만료일까지 유효합니다. 단 국내면허 정지기간에 신청할 경우에는 정지기간이 끝나는 다음날부터 1년간 유효한 국제운전면허증이 발급됩니다. 수수료는 9,000원입니다.  그럼 어떻게 발급해야 할까요? 우선 발급장소는 많습니다. 전국 운전면허시험장, 경찰서, 인천공항과 김해공항 국제운전면허 발급센터에서 신청할 수 있습니다. 구청에서도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하는 곳이 있습니다. 미리 전화로 확인한 뒤 방문하세요. 온라인 신청도 가능합니다. 온라인 신청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가능하지만, 하루에 발급건수를 400건으로 제한합니다. 수수료 이외에 등기비용으로 3...

조선왕조실록 속 오키나와, 류큐왕국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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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왕국(유구국)에 대한 기록이 많이 등장합니다. 류큐왕국은 현재 오키나와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된 해양 왕국으로, 중국(명·청)과 일본(사쓰마번),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조선과의 관계는 주로 외교·무역·조공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조선과 류큐의 관계 1) 조선과 류큐의 외교관계 조선은 류큐를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였으며, 명(明)나라와 마찬가지로 류큐의 사신을 예우하였습니다. 특히 세종(世宗) 대에는 류큐왕국 에서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 무역과 외교 관계를 맺고자 하였고, 이에 대해 조선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세종 25년(1443년) 실록에서는 류큐왕국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여 외교 문서를 전달하고, 무역 허가를 요청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하며, 양국 간 교역을 허용하였습니다. 이후 성종(成宗) 시대에도 류큐왕국 사신이 여러 차례 방문하며 외교 관계를 지속하였습니다. 2) 류큐의 조공과 무역 류큐왕국 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 무역 체제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과도 조공 및 무역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류큐왕국 사신들은 주로 말린 해산물, 유황, 산호, 말, 마노 등의 특산물을 조선에 가져왔고, 조선에서는 곡식, 면포, 서적 등을 류큐에 보냈습니다. 숙종(肅宗) 시대 실록에는 류큐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여 특산물을 바치고 조선의 선진 문물을 배우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조선의 유교 경전과 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조선으로부터 서적과 문방구를 수입하기도 하였습니다. 2. 일본과의 갈등 속에서 조선과 류큐의 관계 류큐왕국은 지리적으로 일본(특히 사쓰마번)과 가까웠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조선과 유사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일본이 류큐왕국을 침략할 조짐...

오키나와와 조선: 역사적 교류, 문화적 유사성,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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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오키나와를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키나와는 우리와 관계가 깊습니다. 오키나와와 조선은 역사적으로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류큐왕국은 조선과 무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도 받았습니다. 류큐왕국과 조선의 교류사, 문화적 유사성, 현재적 재조명 필요성을 살펴봅니다. 1. 오키나와와 조선의 역사적 교류: 무역과 외교의 중심 오키나와와 조선은 오래전부터 활발한 교역과 외교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오키나와는 삼국시대와 이를 통일한 류큐왕국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류큐왕국은 일본, 중국, 조선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반코쿠신료(万国津梁) 입니다. 즉 '류큐왕국은 남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배를 만국의 가교로 삼아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특히 조선의 사신들이 류큐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통해 자연스레 양국 간의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류큐왕국은 14세기 후반부터 조선과 직접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며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공예품, 도자기, 비단 등의 물품을 류큐에 수출했으며, 류큐 역시 다양한 남방산 물품을 조선으로 들여왔습니다. 당시의 조선왕조실록에도 류큐와 관련된 기록이 다수 남아 있어, 두 지역 간의 교역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양국 간의 문화적 교류도 주목할 만합니다. 조선의 유교적 가치와 예법은 류큐의 궁정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류큐의 해양문화와 개방적인 교역 방식은 조선에 새로운 자극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단순한 경제적 거래를 넘어 문화적, 외교적 관계까지 확장되었습니다. 2. 문화적 유사성: 동아시아의 공통적 특징과 고유성 오키나와와 조선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적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독자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두 지역 모두 유교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가치관을 발전시켰으며, 가족 중심의 사회 구조와 전통 의례가 유사한 점으로 꼽힙니다. 특히, 오키나와의 민속...

오키나와 역사유산 완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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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는 과거에 동아시아의 교역국가였던 류큐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슈리성을 포함해 다양한 역사 유적지가 산재합니다. 조선과의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오키나와를 여행하면서 류큐왕국의 역사를 탐구하며 오키나와의 매력을 깊이 느껴보세요. 1. 오키나와 역사유산: 슈리성 슈리성은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유적지로, 류큐왕국 시대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명소입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된 슈리성은 단순한 성이 아니라 류큐왕국의 정치, 문화, 외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슈리성의 건축양식은 일본 본토와는 달리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스타일로, 오키나와만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슈리성은 역사적으로 수난에 시달렸습니다 . 다섯번이나 화재로 전소됐습니다. 1945년 태평양전쟁 당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이후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나 2019년에도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현재 본전 등은 복원 중입니다. 슈리성은 관광객에게 류큐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특히 성의 주요 부분인 '슈레몬'(守礼門)은 정문으로 환영과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곳을 방문하면 단순히 성을 보는 것을 넘어, 류큐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 복원되는 과정을 견학할 수도 있습니다. 슈리성을 둘러본 후에는 근처의 '류탄 연못'을 방문해 보세요. 이곳은 류큐왕국 시대 왕족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던 장소로, 고즈넉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습니다. 슈리성과 류탄 연못은 함께 방문하기에 이상적인 코스로, 오키나와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2. 오키나와 전쟁 유적지: 평화기념공원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당시 참혹한 전투가 벌어진 지역입니다. 미군의 본토 진격을 늦추기 위한 방파제로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오키나와네는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유적지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

학생 여행을 위한 오키나와: 문화탐방, 역사유적, 학습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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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는 또 다른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매력적인 여행지입니다. 특히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역사 유적과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오키나와에서 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역사와 문화 탐방, 그리고 학습적인 가치가 있는 여행 코스를 소개합니다. 1. 오키나와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 인천에서 비행기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오키나와는 류큐왕국의 중심지로, 일본 본토와는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류큐왕국 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며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교류를 이어왔습니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의 전통문화와는 다른 고유의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바로 슈리성 입니다. 슈리성은 류큐왕국의 수도였던 슈리 지역에 위치한 성곽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슈리성을 방문하면 류큐왕국의 정치, 문화, 건축 양식 등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슈리성 내부는 복원 작업 이 이루어진 부분이 많지만, 당시 왕국의 웅장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전시물들이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슈리성은 지금까지 다섯번이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복원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역사적 교훈과 함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흥미로운 학습 기회가 됩니다. 또한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하고도 참혹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학생들은 평화기념공원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중요성을 배우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전시관에서는 전쟁 당시의 기록과 사진, 그리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학도병과 강제노역자를 위한 위령비도 있습니다. 2. 오키나와에서 만나는 전통문화 체험 오키나와의 전통문화는 일본 본토와는 다른 독자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 조선 등의 문화를 융합한 문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이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전통문...

오키나와, 역사 애호가라면 꼭 가봐야 할 특별한 여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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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은 단순한 즐거움 그 이상입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현장은 그 자체로 강렬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일본의 오키나와는 그러한 역사 애호가에게 완벽한 여행지입니다. 오키나와는 류큐왕국 시절의 찬란했던 역사와 일본 본토와는 다른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여행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오키나와의 역사적 명소와 문화탐방에 초점을 맞추어 여행 계획에 참고할 수 있는 알찬 정보를 소개합니다. 1. 슈리성, 류큐 왕국의 중심지 오키나와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명소로는 단연 슈리성(首里城) 이 있습니다. 슈리성은 과거 류큐왕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성의 독특한 붉은색 건축물은 중국과 일본의 문화가 융합된 류큐 양식을 보여줍니다. 슈리성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되었지만, 2019년에 화재로 인해 주요 건물이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섯번이나 화재로 소실되고 복원했습니다. 류큐왕국의 흥망사 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2026년까지 슈리성 복구 작업 이 계속될 예정입니다. 현재 본전 등 일부를 복원 과정을 공개하고 있으며, 그외 화마를 피한 곳은 관람객들에게 개방되어 여전히 그 웅장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 내부에는 류큐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한 박물관이 있어, 방문객들이 당시 왕국의 정치 체계, 예술, 생활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슈리성을 방문하면 류큐왕국의 찬란했던 전성기와 함께 이곳을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역사 애호가라면 슈리성에서의 시간을 통해 류큐왕국의 독특한 매력을 직접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 골목길을 걸으며 상념에 빠지는 것도 좋습니다. 2. 류큐왕국의 자취를 만나다: 나키진 성터와 잔파미사키 슈리성 외에도 오키나와 전역에는 류큐왕국 시절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여러 유적지가 있습니다...

오키나와 심층분석: 역사적 가치, 전통문화, 관광지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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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일본에서도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곳입니다. 류큐왕국의 전통문화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매력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오키나와의 역사적 가치, 전통문화, 그리고 놓칠 수 없는 관광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1. 오키나와의 역사적 가치: 류큐왕국에서 현대까지 오키나와는 독특한 역사를 간직한 일본 속의 또다른 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본토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던 류큐왕국 시대는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꼽힙니다. 류큐왕국 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동아시아 해양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 시기의 흔적은 현재 오키나와 곳곳에 남아 있으며, 슈리성(Shurijo Castle)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슈리성은 류큐왕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슈리성은 류큐왕국의 흥망사 를 상징하며, 오키나와 사람들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슈리성 은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전소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19년 10월 말에 대화재로 전소되었으며, 현재는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복원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투어도 있습니다.  아픔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습니다. 연합군의 본토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방패막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여러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평화기념공원(Peace Memorial Park)과 히메유리탑(Himeyuri Monument)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전쟁의 상흔과 평화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류큐왕국은 1609년 사쓰마번의 침공 으로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1879년 류큐 처분 을 거쳐 일본에 완전히 합병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류큐왕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

류큐 독립운동, 전개과정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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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독립운동은 일본 남부에 위치한 류큐 제도(현 오키나와현)를 중심으로 일본 본토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류큐 왕국의 역사적 유산, 독특한 문화와 언어, 그리고 일본으로의 병합 과정에서의 억압적인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화적 정체성과 경제적 불평등, 미군 기지문제 등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은 점점 감소하고 있습니다. 1. 류큐 독립운동의 역사적 배경 현재 오키나와는 15세기 초에 삼국을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이 성립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영을 이룩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조선, 일본 등과 활발한 해상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으며, 독특한 문화와 언어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1609년 에도 막부의 묵인 하에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 이후 간접적인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79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 왕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오키나와현으로 편입( 류큐 처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왕국 체제가 해체되고, 류큐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은 억압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오키나와 전투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사망했으며, 사회적 시설과 문화적 기반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전후 오키나와는 미군의 군사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습니다. 반환 이후에도 오키나와는 군사 요충지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는 미군 기지가 집중되었으며, 주민들은 토지 강탈, 환경 파괴, 범죄 증가 등과 같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류큐 독립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2. 류큐 독립운동의 전개 류큐 독립운동은 류큐 왕국이 사쓰마번에 의해 점령당한 16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1950년대에 전개되었습니다. 미국 통치 하에서 일부 류큐 주민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저항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독립운동은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며, 일본과의...

류큐 처분과 류큐 왕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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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처분은 일본 메이지정부가 류큐 왕국을 완전히 합병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류큐 왕국은 청나라의 책봉체제에서 벗어나 일본에 복속되었으며, 이후 급속하게 일본에 동화됩니다. 그 시작은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이었으며, 일본은 서구 열강의 묵인 하에 청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1. 류큐 처분의 배경 류큐 처분(琉球処分) 혹은 류큐 합병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류큐 왕국 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일본의 행정구역으로 완전히 편입된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 시작은 1872년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 이었으며, 청나라와 외교적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해 1879년에 류큐 왕국을 해체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이 근대국가(국민국가)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영토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치밀하고 교묘하게 추진되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은 제국주의로 팽창하게 됩니다. 우선 류큐 처분의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메이지 유신과 영토 확장 일본은 1869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봉건적 다이묘 체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수립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는 기존의 번(藩)을 폐지하고 부현(府県) 체제를 도입했으며, 전국적인 행정 통일을 추진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이러한 통일 정책의 표적, 즉 발판이 되었습니다. 당시 류큐 왕국은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영토확장을 노리고 있던 일본 정부는 류큐 왕국의 지배를 넘어 영토의 일부로 차지하기 위한 전략에 나섰습니다.   2) 류큐의 외교적 위치 반명 류큐 왕국의 외교력을 급속하게 약화되었습니다. 류큐 왕국은 오랫동안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이중 조공 체제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외교적 입지를 확보해 왔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류큐 왕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속국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있습니다. 19세기 말에는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을...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 배경, 과정,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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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번의 류큐 침공은 17세기 초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흔든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묵인 하에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을 침공해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지배력을 강화한 뒤, 1872년에 류큐 왕국을 해체했으며,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합병했습니다.  1. 류큐 침공의 배경 1609년 가고시마현을 지배하던 사쓰마번(薩摩藩 )의 류큐 침공은 일본 에도 시대 초기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1429년에 삼국을 통일하면 탄생한 류큐 왕국은 가고시마현 아마미 제도부터 오키나와 본섬, 미야코지마와 이시가키지마까지 세력을 확대하며 발전했습니다. 이들 지역을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에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나1609년에 사쓰마번의 침공으로 류큐 왕국은 급속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에도 막부와 류큐 왕국의 관계도 에도 막부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당시 사쓰마번은 현재 가고시마현 아마미 제도를 시작으로 오키나와를 무력으로 공격했습니다. 우선 침공의 배경부터 살펴볼까요? 1) 일본과 류큐 왕국의 관계 류큐 왕국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해상 교역국으로 발전했으며, 일본과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무역 관계를 확대했습니다.  특히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류큐 왕국 경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일본은 중세부터 류큐와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에도 시대에 접어들어 도쿠가와 막부는 류큐 왕국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했습니다. 한편 1588년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류큐 왕국이 사신을 파경하지 않는다며 보복하고자 합니다. 이후 조선을 침공하면서 류큐 왕국에 군대 파병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군량미로 대신하고자 했으며, 명나라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2) 사쓰마번의 정치적 입지 강화 한편 사쓰마번은 일본 남서부의 강력한 봉건영주 다이묘가 지배하는 작은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신하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영향력을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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